베들레햄 Bethlehem
베들레햄은 예루살램으로 부터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해발 770m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인구 약 3만 명 정도의 아랍인 마을이다.
베들레햄은 희브리어 Bet(집) + Lehem(빵)의 합성어로 "빵집"이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성경에 여러 곳에 등장한다.
① 창세기에 야곱의 아내 라헬의 죽음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등장 한다(창세 35.16-20).
② 롯기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후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햄으로 돌아 왔다.(롯기 1.19-22)
거기서 룻은 보아즈를 만나 결혼했다.
③ 베들레햄은 이스라엘 두번째 임금인 다윗(BC1010-970)이 태어나 목동으로 자라고,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했다는 곳이며(사무 16.1-13). 나자렛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라와 예수가 탄생함으로써 영원히 사라 지지 않는 곳이다.
베들레햄은 마르코,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야기 하듯이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다윗 왕의 고향이라는 사실 만으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성스럽고 자랑스러운 도시가 되었다.
예수님
탄생 이후 베들레헴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마음 속에 가장 성스럽고 소중한 장소로 자리 잡게된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전설에 의하여 예수님 탄생지는 마을
동쪽 끝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신전 밑 동굴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곳에 신전을 철거하고 헬레나모후의 신앙심을 추모하닌 기념으로
모자이크와 벽화로 장식된 웅장한 성당을 세운다. 야곱의 사랑을 받던 라헬의 무덤이 입구 길가에 있고, 목자들의 들판, 동굴등
잘보존되여 있기도하여 한 작은 도시 베들레헴은 지난 2천년간 성지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성탄절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만명의 순례자들이 베들레헴에 몰려들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큰 행사를 벌이는 곳이다.
관련 성서 :
1사무16,1-13절. 마태복음 2장1-18절, 루카복음 2장,1-20절
예수님 탄생 성당 Church of the Nativity
325년 예루살램의 주교였던 성 마카리우스가 콘스탄틴황제에게 성지에 성당을 세워주기를 청했고, 황제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성지를 방문 후 3개의 성당을 세웠다. 첫번째 성당은 예루살램의 예수무덤위에 세웠고(예수님 무덤성당), 두번째는 베드레햄에, 세번째는 올리브산에(주님의 기도 성당) 세웠다.
로마 황제 하드리안은 제2차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후 예수님 탄생 둥굴 위에 기독교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하드리아누스 신전을 세운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는 324년 베들레헴으로 성지 순례를 와서 예수 탄생지로 전해 오는 동굴을 참배한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동굴 위에 성당을 짓토록 부탁하여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9년 하드리아누스신전을 철거하고 성당을 봉헌였다. 이 성당은 529년 사마리아인들의 폭동 때 크게 타버리고,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531년 다시 복원되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후 여러번 주인이 바뀌었으나 유스티나누스 황제가 복원한 성당은 지붕과 바닥과 내부 장식 정도만 바뀌었을뿐 나머지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성당 내부 나무 복도로 덮혀 있던 4세기 교회의 모자이크가 일부가 1936년 발견되었고, 십자군들에 의해 만들어진 모자이크 단편들도 성당 위와 앞 부분에 남아 있다. 성당 입구에는 원래 3개가 있었으나 2개는 막아서 벽이 되었고, 중앙으로 들어가는 문는 십자군 당시 성당을 보수 할 때 높이을 1.2m로 낮추고 그폭도 좁게 만들어 버렸다. 문을 축소한 것은 약탈자들이 말이나 마차를 타고 성당에 출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성당은 길이 170피트,폭80피트의 십자가 형태이고, 이스라엘 빨간 벽돌로 만든 4줄기의 돌 기둥로 내부는 5개의 통로로 나뉜다. 아름다운 그리스 정교회 중앙제대 장식은 레바논의 삼목을 손으로 조각한 것이다.
예수님 탄생 성당은 카톨릭을 대표하는 프란치스코회와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간에 현상유지법이 적용되는 곳으로 세종파간 성당 소유권 및 사용권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예수님 탄생 성당 대부분은 그리스 정교회의 소유이다. 단, 예수님 탄생동굴 위의 제대에서 왼쪽부분은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소유이고, 구유 동굴부분인 구유제단과 구유는 카톨릭 소유이다.
1881년 예수님 탄생성당 옆에 붙여지어 카타리나 성녀에게 봉헌한 성당(카타리나 성당)과 예수님 탄생동굴 옆에 있는 무죄한 어린이들 경당과 성 요셉에게 봉헌된 경당 그리고 예로니모 성인 경당과 성 파울라와 에우스토키움 경당은 카톨릭 소유이다.
예수님 탄생 동굴 The Grotto of the Nativity
예수님 탄생 성당 중앙제대 오른편 밑으로 층계을 내려가면 제대 바로 아래쪽에 폭 3.5m, 길이 12.3m 정도의 동굴이 있고 48개의 등불이
켜져있다. 은으로 만든 별(Star of Bethlehem)이 예수님이 태어난 위치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곳에
라틴어로'Hic de Maria Jesus Christus Natus
est'(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라고 쓰여져 있다.
뒤쪽에는 예수님이 태어난 당시의 구유(The Holy Manger)가 놓어 있다. 구유는 마초를 두던 곳으로 추정되며, 그 위으 벽은 초와 램프의 연기로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말구유 제단 옆으로 동방박사 세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던 자리에도 '동방박사의 제단'(Alter of the Three Wise Men)을 만들어 놓고 있다. 이 곳은 카톨릭 소유로 매일 아침 0500와 0730에 미사가 봉헌 된다.
카타리나 성당
프란치스코회는 1881년 성당을 지어 성녀 카타리나에게 봉헌하였다.
성탄절 전야에 예루살램 주재 카톨릭 총대주교가 집전하여 전세계로 방송되는 미사가 이 성당에서 집전된다. 내부죄석은 약 300석 정도이다. 우리는 어렵게 입장 티켓을 구해 입장할 수 있었으며, 자정미사를 위해 저녁 9시에 입장하여 미사가 끝나는 새벽 2시 반까지 장장 5시간 반을 화장실도 못가고 꼼짝 못하고 있어야 하는 인내를 감래해야만 했다.
<카타리나 성녀>
알렉산드리아의 동정 순교 성녀인 카타리나(AD310년)는 10세기 부터 동방교회에서 가장 높이 공경해 오던 성녀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젊고 아리따운 [그리스도인]으로 코스투스 왕의 외동딸이었으며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와 대립했다. 그녀를 설득하여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하는 데 실패한 막센티우스는 현자들을 보내 그녀를 회유하도록 했다. 50명의 철학자들과 웅변가들이 그녀를 찾아가 위협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갖은 감언이설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단념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되려 카타리나는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오히려 그들을 기독교야말로 진리임을 인정시켜 개종시키게 만들었다. 이 일로 황제는 크게 분노하여 개종한 현자들을 모두 화형에 처해 버렸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굶어 죽도록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12일 동안 그리스도가 카타리나에게 [비둘기]를 보내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막센티우스는 카타리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여 많은 못이 박힌 바퀴를 돌리면서 그녀의 몸을 잘라 죽이려고 했으나 그녀가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자 [천사]가 하늘에서 검을 들고 내려와 카타리나의 몸을 갈가리 찢으려던 바퀴를 부서버려 목숨을 부지했다. 부서진 바퀴의 파편들은 몰려오던 구경꾼들에게 날아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결국 카타리나는 참수되었으며 참수된 목에서는 피 대신 우유가 흘러나왔다. 카타리나의 시신은 나중에 천사가 회수하여 하얀 수의에 감긴 채 [시나이 산]으로 운구되었다고 하며, 이곳에 동방정교회의 수도원이 세워졌다.
카타리나에 대한 공경은 10세기 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녀는 [잔 다르크]에게 충고를 하던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성 예로니모 서재 동굴
카타리나 성당지하계단으로 내려가면 여러 동굴들이 있는데 평시에는 닫혀있고 공식 전례시만 사용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요셉성인에게 봉헌된 제대,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무덤제대와 성인이 활동 했던 서재동굴, 그리고 예로니모 성인을 도왔던 아울라 성녀와 그녀의 딸 에우스토키움 동정 성녀 봉헌제대가 있다.
헤에로니무스(에레니모) 성인은 두 모녀(성녀 바울라와 그달 에우스토키옴)가 사망하자 자기 서재 근방 동굴에 그들을 묻어주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성인 자신도 생시에 자신의 비문까지 작성해두고 자기 서재 근처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13세기 성인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그 중 예로니모 성인이 서재로 쓴 동굴은 에레니모(A.D 347~420)가 자기 친구인 다마수스 교황의 뒤를 이을 후임 교황이 되려고 백방으로 노력 하였으나 성공 하지 못하자 로마를 떠나 386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무려 34년간 은거하면서 집필을 하고 한편으로는 수도를 하였던 곳이다. 에레니모 성인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불가타('공동번역'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 성서(역본)로 불리며, 가톨릭 교회에서 표준 라틴어 성서를 사용되고 있다.
성 예로니모 <히에로니 스 (Eusebius Hieronymus)> 영어 : Jerome. 우리말 : 예로니모
347-419/420년, 축일 : 9월30일 성 히에로니무스(예로니모)는 389년경 베들레헴에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고, 347 베들레헴에서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예로니모가 팔레스타인으로 가기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과 함께 공인된 불가타(Vulgata) 성서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표준 라틴어 성서로 사용되고 있다.
성서와 금욕주의·수도원주의·신학에 대해 쓴 수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예로니모는 폭넓은 학식, 특히 고전, 성서, 그리스도교 전승에 대한 이해로 유명하다. 예로니모가 마지막 3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남긴 문학 유산은 당대의 논쟁들, 성서에 열정, 수도원 생활의 산물이다. 서방 가톨릭교회의 4대 교부(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중의 하나이다
★ 불가타 성서-성서의 유래
'공동번역'이라는 뜻의 라틴어 editio vulgata에서 유래 예로니모가 번역한 것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382년 교황 다마스쿠스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에게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로니모는 <70인역 성서〉를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역을 펴냈으나, 〈70인역 성서〉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히브리 성서 원본을 토대로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405년경에 이 작업을 끝마쳤다. 예로니모의 번역은 즉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6세기 중엽부터 모든 낱권 성서들을 하나의 겉표지로 묶은 성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하는 <70인역 성서〉의 일부도 이전의 번역본에서 취하여 포함시켰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가 라틴어 성서로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결점을 최소한으로 줄여 이를 출판하라고 요구했다.1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발행한 이른바 〈클레멘스 불가타 성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있는 성서본문이 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1941년 "성심회" 역본이 번역 되었고, 현대에 들어와 여러 교정판이 출판되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를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목동들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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